왜 일본은 독도 – 다케시마를 가질 수 없는가? 2

1905년 독도 지역 정치, 경제 그리고 인구 그리고 현재
왜 근대 아시아는 과거 식민지 시대로 되돌아갈 수 없는가
다음 페이지는 1905년 전후 일본에 편입된 울릉도 부속도서 독도 다케시마에 관한 명확한 사진을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이 지역의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인구를 비교하고 근대적 관점에서 일본의 독도 소유를 규정짓고자 한다. 독도는 한편으로 리앙쿠르 암초(Liancourt 바위) 또는 일본에 의해서 다케시마라고 불리기도 했다.

1905년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왜 중요한가?

일본은 다케시마 주장 근거를 전적으로 1905년 리앙쿠르 암초(독도) “편입”에 두고 있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 사이의 경계는 20세기 초까지 다시 그어져야 했는가? 이 페이지는 일본에 편입된 독도-다케시마 지역의 인구적 정치적 차이가 나타난 부분을 제공하고, 그리고 지금의 이 지역 권리 실체의 차이를 보여주고자 한다.

우리는 식민지 시대 한국의 근대 영토제한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상세한 독도 – 다케시마 지역 지도
아래에서 우리는 몇 몇 동해 지도들에서 지역의 한국, 일본 그리고 관련된 섬들을 볼 수 있다. 다른 지도는 독도의 가장 근접한 섬 한국의 울릉도를 보이고 있다. 이 울릉도 지도는 독도 주변 수역들에 의존하고 있는 어업 항들이다. 이 시리즈의 다른 페이지에서, 우리는 20세기 초 오래된 사진을 볼 수 있고 이와 함께 근대 사진에서 식민지 시대에 어떻게 울릉도가 개발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지도 위 왼쪽에 보이는 한국 동해안, 동해, 울릉도, 독도 그리고 일본의 오키섬 인접한 일본이다. 오른쪽에는 한국의 울릉도는 지도이다. 중요 어항 현포, 사동, 도동 그리고 저동은 붉은 점으로 나타나 있다. 고해상도 그림을 보려면 지도들 클릭하시오.
1905년 이전의 독도-다케시마 지역 상황
일본 민간인들이 한국의 울릉도에 침입하다
“…어떻게 일본 민간인의 한국 울릉도 침범이 독도 (다케시마)와 관련되는가..?”

한국의 울릉도의 섬에 일본 민간인 침범은 일본의 리앙쿠르 암초(독도) 개입과 이후 섬의 불법편입의 전체적인 기본이 된다. 불법 거주 또는 몰래 숨어든 일본인들은 조선의 울릉도를 통해 리앙쿠르 암초(독도)에서 활동을 하였다. 모든 한국과 일본 역사적 기록에서 이들 일본인 도해자들은 무지하고, 폭력적이며 매우 공격적인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일본외무성 관리 스스로도 불법 거주인들은 난폭하고 잠재적인 살인자로 분류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 관리들은 울릉도 다스리기를 두려워했다.

이들 도해자들 중의 어떤 사람은 일본정부에 의해서 이용되어 일본인들이 그들의 현재 다케시마 독도주장을 위한 “합법적” 근거로 삼았다.

나가이 요사부로(오른쪽)라는 한국의 울릉도 불법체류 일본인은 그가 리앙쿠르 암초(독도)에 살고 있었고 점령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섬을 임대하려는 신청을 한다. 현실적으로 그의 조선의 울릉도에서 수행한 움직임 그리고 민간인 편입은 리앙쿠르 암초(독도)(링크)에 해군 감시초소룰 건설하려는 일본의 실제 야심을 위한 단순한 “합법적” 행동이었다.(링크)

아래에서 우리는 어떻게 일본의 외무대신 하야시 곤수케가 이들 공격적 도해자들을 쫓아내기를 거부하고 한국정부의 동의 없이 일본인 경찰관을 울릉도에 주둔시키려고 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1899년 황성신문 한국 울릉도 보고
“..일본인 도해자들은 분탕을 일으키면서 나무를 베고 한국인들을 위협한다..”
1899년 황성신문 울릉도 보고는 조선의 울릉도에 관한 일반적인 소식을 전하며 한국 부산세관에 근무하면서 1899년 6월말 일본인 불법체류자들 그리고 섬에 침입한 도적의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서 울릉도로 간 E. Laporte의 보고서 요약문을 게재하였다. 기사는 한국 외무부가 일본의 대사에게 울릉도에 있는 일본인을 추방하도록 요구한 9월 16일 이후에 쓰여진 것이다.“
“…1895년 (開國五百四年에), 내무대신은 섬 거주민 배계주를 감독으로 임명하고 섬을 관리하도록 했다. 이 해 봄에 (1899), 배계주는 내무대신에게 보고하기를 많은 일본인들이 최근에 와서 나무를 베고, 거주지를 침범하고, 그리고 분란을 일으키기 때문에 정부가 법으로 다스리기를 요청하였다.

이로 인하여 내무대신은 한국 해관서리 John McLeavy Brown를 파견하여 산에서 무차별적으로 베어 수출하는 좋은 나무들은 항구로 운반된 나무들이 헐값에 팔리고 있는 섬의 상황을 조사하도록 명했다..

거기에는 약 200명의 일본인들이 집을 짓고 일시적으로 살고 있었다.(불법거주) 그들은 지방민들과 다투며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제품을 팔 때, 그들은 단지 2%의 수수료만 주었고 세금은 내지 않았다. 이 해 9월에 내무대신은 위의 보고서를 근거하여 외무성 주한 일본공사에게 요구하여 일본인들의 침입을 중지시키고 섬에서 나갈 것을 요구하였으며 비개항지에서의 밀무역을 금지하도록 요구하였다…”(큰 이미지를 보시려면 클릭하시오)

이 관리들의 항의는 리앙쿠르 암초(독도)의 일본 편입이전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울릉도 침입은 수 세기 이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첫째 불법거주자들의 문제는 1800년대 중반에서 후반에 일본의 새로운 메이지 정부가 이전의 막부가 울릉도와 독도 항해를 엄격히 금지한 고립정책을 버렸을 때 있었다.(링크를 보시오).

위 이미지는 20세기 초 한국의 울릉도에 지은 일본인 신사사진이다. 울릉도의 동해안 도동 항구는 섬에서 일본인 거주자의 가장 큰 집합소였다.(더 큰 이미지를 보려면 클릭하시오)
일본의 외무대신 하야시의 대답:
“..울릉도의 일본인 도해자들은 일본의 책임이 아니다…”
“..일본인들이 불법으로 나무를 벤다면 일본의 벌채 권리를 인정하라…!”
다음 문서들은 울릉도 상황이 어떻게 통제되지 않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일본인들은 지금 울릉도 약 8 곳에 거주하고 있다. 비록 러시아는 울릉도에서 합법적으로 벌채 권리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일본인들은 무차별적으로 나무를 베고 있다. 하야시는 일본인 도해자들을 쫓아내기를 거부하고 그리고 뻔뻔스럽게 한국이 러시아의 벌채 권리 양해를 종결시키고 그것을 일본에 팔 것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명확하게 그 문제를 다루는데서 조선이 얼마나 힘이 없었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위 문서들은 독도 편입 이전에 울릉도의 일본인 침입자들 그리고 불법 벌채자들과 관련된 한국문제를 기록하고 있다.
한국의 울릉도에서의 일본정부 불법활동 기록
“…8월 19일. 8.40 p.m. Koshi, 서울. 7

귀하의 전문 109에 언급한 상황에 따라 제국내각은 러시아 내각의 일본인 鬱陵島 벌채를 중단해달라는 요구에 대해서 당신에게 지시컨대 元山 주재 二等領事 또는 釜山 주재 領事官補 중의 한사람을 신속한 수단으로 파견하여 그 문제를 보고하도록 결정하였다. 동시에 제국내각은 현재 한국 내각에게 巨濟島를 개방하도록 요구하는 기회로 삼고 그리고 이 순간에 귀하는 우리의 목적을 위해 노력을 비밀리에 잘 수행하도록 명한다. 우리는 조심해야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다른 강대국들이 한국에 대해서 이와 유사한 요구를 하도록 하는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되며, 따라서 최대한 노력을 경주하여 가능한 한 획득하도록 할 것이며 한국 내각으로 하여금 어떤 요구도 할 수 없게 하여야 함을 숙지하여야 한다.

아오키, 도키오 144. 釜山에서 보낸 高雄書記官 보고서는 다음과 같다:

상당한 애로 끝에 그는 鬱陵島에 상륙하였다. 섬에는 일본인이 약 100명이 있었고 그들은 여덟 곳에 거주하고 있었다. 언덕이 많은 섬의 지형 때문에 그리고 의사소통이 어려워 그는 모든 장소를 돌아볼 수 없었고, 두 우두머리에게 모든 일본인은 그곳에서 11월 30일까지 떠나도록 명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울, 18/10. 2:30 p.m. (1899-10-18)

아오키, 도쿄 152. 鬱陵島 질문과 관련하여 저는 일본인들을 그 섬에서 떠나도록 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은 섬을 떠나라는 명을 받았지만, 그러나 이것은 다만 명목적인 것일 뿐 일본정부 당국이 감시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더구나 저는 한국지방 당국의 인식과 함께 거주자들이 거기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벌채 양해에 관하여 저는 러시아 담당관과 한국 외무대신을 관찰하고, 그 요청에 관한 가장 좋은 답변은 러시아가 권리를 일본인에게 판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기밀문서를 보냅니다. 機密第九十六號信 날자 九月□日…”

하야시 곤수케는 누구인가? (林公使)
그는 서울 주재 일본 외무대신으로 1904년 2월 23일 일본-한국 의정서에 서명하도록 한국정부를 강제하고 협박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리고 뒤이은 조약은 한국 나라의 권리를 편입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링크를 보시오) 사실상, 1904년 3월 하야시 곤수케에 의히여 양해각서가 작성되고 그것은 다음해에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에서의 일본의 팽창주의 정책을 펴는 청사진이 된다.
하야시 (오른쪽에) 역시 일본인 땅 소유를 위하여 로비를 함으로서 일본인들을 위하여 한국을 개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야시 곤수케는 일본인 민간인들이 한국영토를 구입하고 등록하여 정착할 수 있도록 압박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는 나고모리 후지요시로가 입안한 나고모리(Nagomori) 계획의 지지자였다. 나고모리의 계획은 일본의 사적인 민간인들이 구역의 정착민이 아닌 사람에게 땅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조약 제한을 회피하여 토지매입을 허용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하야시 곤수케 역시 외무대신 이하용과 함께 일본인들이 그들의 땅에 대하여 사용할 권리를 보장하는 한국인들에게 장기 저당을 허용해 주는 비밀협약을 협상한다. 이들 저당 거래는 만약 한국인이 대부금을 상환하지 못하면 땅의 소유권을 넘겨주는 것을 약정하는 거래다..

위 기록에 보이는 것처럼, 일본외무대신 하야시는 한국의 울릉도의 문제에 대하여 절망적인 소식을 듣는다.

“…따라서 조선의 불법 거주 일본인 퇴거 요청에 대한 하야시의 대응은 무엇이었는가..?”
한국정부 요구처럼 이 사람들 철수하는 대신, 하야시는 단순하게 이 요청을 거부하고 그는 결론 내리기를 “이들 일본인들은 철수할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은 지방 당국의 인정하에 거기에 거주하고 있다고 믿는다..” 어떻게 그가 이 결론에 도달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야시의 해결책은 나중에 한국과 상의 없이 모든 일본인 경찰이 울릉도에 주둔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러일전쟁(1904~1905년) 훨씬 이전에 일본인들의 은밀한 토지구매가 진행되고 있었다. 지방 당국은 가끔 이들 거래를 눈감아주었고, 공식적으로는 일본인들이 땅을 사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그러나 만약 그들이 거절하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 이것이 한국의 울릉도 사정이었다.

하야시의 정치적 배경은 왜 그가 일본인 불법체류자들이 울릉도를 떠나는 것을 거부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첫째, 하야시는 한국 전체를 일본에 편입시키는데 적극 나선 사람이다. 역시 그것은 그가 한국인 토지에 대하여 일본인들의 소유권을 강하게 주장하고 이민을 지지하였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인 울릉도 도해자들에 대해서 눈감아 주어서 그가 모든 목적을 쉽게 달성할 수 있었다.

하야시는 의도적으로 일–한 조약을 위반하였다.
일본은 불법적으로 경찰을 한국의 울릉도에 파견한다.
1901년 후반, 하야시 곤수케는 자체수단을 강구하려고 결정하고 일본인 도해자들을 강제로 쫓아내는 대신에 경찰을 주둔시키기로 결정한다. 하야시는 단순히 이것이 20년 전에 일본이 이미 200명이 넘는 일본인 체류자들을 철거했었기 때문에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불법적으로 울릉도에 사는 일본 사람들은 활어기에는 약 1000명이 넘어서고 있었다.

하야시의 자체 허가로 일본인은 울릉도에서 무식하고, 거칠게 그리고 심지어 잠재적인 살인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그들의 폭력행사가 분쟁해결의 수단이라고 말하였다. 역시 이 편지에는 지금 혼란된 울릉도를 부끄럽지 않게 통치하려는 이전 한국인들의 과업에 대한 것도 언급하고 있었다. 그것은 울릉도에서 조선 통치자들은 이제 아주 겁을 내고 그들 자체의 섬을 통치하기를 두려워하였다. 하야시는 한국에게 일본인 경찰을 일시적으로 또는 영구적으로 주둔시키는 것을 하나의 선택권으로 허용하였다. 더 쇼킹한 것은 그의 자체허가가 일-한 조약 규정과도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가 알다시피 비록 하야시가 일본인 경찰주둔이 불법적이란 것을 알았지만, 결국 그는 일본인들의 퇴거를 거부하였다.

일본이 한국의 항의에 대하여 속임수 대응을 한 내용번역
“…일찌기, 울릉도는 도감 (조선 정부 관리)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통치에 따라 이 섬은 새로운 국가 행정관리 강영우가 다스리게 되었다. 그는 곧 울릉도에 도착할 것이고 그 변화의 결과 島監은 해직되고 지금 京城(서울) 에 머물고 있다. 그는 이 섬(울릉도)의 과거 그리고 현재 상황에 대한 소식을 잘 알고 있다. 그의 요약문에 의하면, 거기에는 배계주라는 이름이 보이는데 그는 인천 부근의 영종도에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울릉도에 20년 전 야심찬 울릉도 개발계획을 가지고 왔다. 불행히도 이 섬은 사람이 살지 않는 (주변둘레 130리) 곳이며 그리고 (한국)연안지역으로의 수송교통도 매우 어려웠다. 이 때문에 배계주는 일본인 도해를 요청하고, 그가 오키, 고베 그리고 다른 지역에 개인적으로 와서 섬의 느티나무 원목을 판매하기 위하여 접촉을 하였다. 점차 일본인들은 울릉도에 접촉이 잦아졌다. 나아가, 이것은 한국 사람들이 섬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이것은 울릉도 정착의 기초가 되었다…”

“…따라서 지금 한국인의 수는 울릉도에 5,000-6,000명이고 일본인 거주자는 300-400명이다. 기껏해야 1,000명의 일본인들이다. 일본인들의 인구증감은 어업철에 관련된다. 그중 언급된 일본인들 중에 약 30-40명은 이미 집을 짓고 거주하고 있다. 이 중 많은 사람들의 일본 거주민들이 무지하고 그리고 거칠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 당국도 그들을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주자들 간의 어떤 분쟁이라도 폭력과 심지어 살인으로 해결되고 있다. 특히 한국인들과 함께 그들은 물리적 힘에 의존하고, 따라서 섬의 행정관은 섬의 통제에 애로가 있다…”

“…울릉도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퇴거에 관하여 우리 사무실이 개설된 이래 몇 번 한국정부의 요청이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관리들을 거기에 두 번 파견하고 거기 상황을 조사하였던 바, 울릉도 거주 한국인 그리고 우리 일본인 민간인들 사이의 관계는 지난 수 십 년 동안 발전되어 오늘날에는 더 강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심지어 만약 그들은 (일본인)은 철수한다고 해도 더 많은 일본인들이 을릉도로 돌아오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여기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지 군수 배계주씨가 말하듯이 책임있게 이 섬 교통을 개발하도록 요청한 사람은 한국인들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일본 제국정부는 울릉도에서 이들 일본인들을 쫓아낼 책임이 없다. 차라리, 우리는 이 문제를 차라리 한국정부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공정하다고 결론짓는다…..”

“…지난 해, 7월 4일자 기밀 양해각서 #54에서, 이 문제에 관한 내 의견의 상세한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그해 7월 18일 우리 (일본의) 정부는 기밀 양해각서 #36의 지시로 회신하였다. 이들 지시를 새겨보면서, 이 (일본의) 관리는 첨부된 편지 A와 함께 즉시 한국정부에 요구하여 (한국의) 회신 편지 B를 받았는데, 거기에는 조선의 정부가 우리 추천내용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이 관리는 첨부된 편지 C를 보내고 울릉도에서, 외국인 선교사들은 한국에 살도록 허용하면서 왜 일본인들은 울릉도에서 특히 살지 못하도록 재촉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거기에는 또한 울릉도에 사는 일본인들의 행동은 조약 규정에 제외되어 있다. 우리는 역시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울릉도 한국 당국이며 거기에 따라서 한국정부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본다….” (계속)

위 오른쪽: 이 사진은 20세기 후반 한국의 울릉도에 주둔한 일본인 경찰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경찰은 울릉도 일본인 도해자들을 “통제하도록” 한국정부의 동의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의 지난해 9월 12일자 편지 이후로 약 일년이 지났고 그리고 오늘날까지 우리는 한국정부로부터 회신을 받지 못했으며 그리고 이것은 당신 측에서 우리에 회신에 대한 논박의 수단이 없음으로 해석하고 있다.

새로운 행정관이 관리로 오기 전에, 외무대신, 박제순은 비서와 함께 울릉도 일본인 문제를 다루기 위한 가능한 방법을 논의하였다. 대신은 말씀하시기를 장차 부임할 주 행정관은 이들 일본인 거주자들이 폭력적일까 두려워하여 어떤 일이 발생할 지 알 수 없다고 한다. 그가 듣기로는 이전의 군수(배계주)가 울릉도 일본인을 다루기가 매우 어렵다고 들었다. 새로운 행정관을 만난 비서는 적절한 방안을 강구하도록 말했다. 그 후 새로운 행정관 (강영우)이 관청을 방문하고 비서에게 다시 말했다. 그 대답으로 우리 관리들은 비서를 통하여 두 가지 선택권을 제시하였다; 한국이 우리에게 일본인 경찰을 (울릉도에) 일시적으로 매년 주둔케 하든지, 아니면 영구적으로 주둔케 허용하라는 것이다. 이 제안에 대해서 행정관은 그가 가능한 방안을 찾을 것이라고 대답한 것 같다…”

“…따라서, 배계주의 기록된 대회를 보건데, 그리고 또한 한국 정부의 확실한 의도를 보건데, 만약 우리가 섬(울릉도)에 있는 우리 일본인들을 법으로 다루게 되면 우리는 그들을 관찰하고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섬(울릉도)의 거주자(일본인 그리고 한국인)들 사이에 상호조화가 생겨서 거기서 일본인들을 퇴거시킬 필요도 없다. 이 방법은 만약 우리가 이 섬(울릉도) 편입을 일본제국의 부산 또는 원산에 있는 영사 경찰 구역으로 편입시키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경찰 행정관을 두 경찰 관리와 함께 6개월 또는 일년마다 고정적으로 파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서울에 있는 우리 영사의 경찰 구역 아래에 있는 개성 재판소와 같은 제도로 비교할 수 있다. 거기에는 50~60명의 일본인 거주자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경찰서를 가지고 있고 거기에 파견 관리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동을 감시하기 이하여 주둔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조약 법에 따라 , 이는 일본이 한국 정부에 대해서 주어진 권리는 아니지만, 그러나 현실적으로 한국정부는 전략적으로 이것에 동의하고 그리고 어떤 반대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만약 이 울릉도 문제가 우리 일본인 경찰이 거기에 주둔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면, 단순하게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울릉도 문제는 자연히 해결될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문제를 예방하고, 우리 (일본인)를 강제로 퇴거시키지 않고 이 입장을 기술하여 귀하의 의견을 묻는 것이니 귀하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대신이 무엇을 고려하고 있는지를 지지하는 당신의 입장을 조속히 밝혀주기 바란다….”

1902년 10월 13일, 한국은 일본에게 다시 항의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인 도해자들과 경찰을 울릉도에서 모두 퇴거시키라..!”
1902년 4월에 일본인 경찰은 주둔하였고 한국정부는 그해 가을 10월 13일에 항의하였다. 다시 조선은 모든 일본인 경찰 그리고 도해자들을 퇴거시키도록 요구하였다. 한국인들 역시 일본인 경찰이 울릉도에 사는 한국인들을 불공정하게 다룬다고 항의하였다.

이미지들은 문서원본들은 울릉도에서 불법일본인 체류자들을 한국이 추방시키지 못했음을 기록한 문서들이다.(아래 번역)
“…울릉도에 사는 일본국적자들의 강제퇴거에 관하여. 이 건은 박 대신의 임기 동안 몇 번 조사되었다. 1900년 9월 7일, 질의 번호 64, 거기에는 4번 회신이 있다. 그러나 귀하의 9월 12일자 회신 편지에 반박은 찾을 수 없다.

그 대신에 귀하의 편지에는 다만 언급하기를 “… 외국인 거주자들이 항구 밖에 거주하거나 도시에 거주하는 것은 조약에서 금지되어 있다는 것은 일본과 한국 조약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역시 귀국의 다른 우호 국가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왜 한국정부는 다른 외국 선교사들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도록 허용하면서 우리 일본인들을 울릉도에서 떠나라고 요구하는가? 우리 (일본인) 외교 관리는 이해할 수가 없다. 한국정부가 조약에서 지정한 개방지 밖에서 모든 외국인 거주자들을 추방하지 않는 한, 우리 일본인 관리는 우리 일본인이 울릉도에서 떠날 수 없다는 것으로 생각한다…” (계속)

“…앞에서 말한 귀하의 성명에서 한국을 여행하는 외국인 선교사에 대하여 말하자면, 모든 외국인들은 우리가 여행증명서를 발급하기 전에 모두 한국의 특별법에 따라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이 외국인 여행자들은 한국정부가 밠행한 여행증명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 조약에서 “이 나라의 외국인은 이 특별한 비자를 가지고 여행하도록 허용되어 있다…” 또한 특수한 국가의 외국어를 가르치는 외국인 선교사들은 한국조약법 9조에 따른다.

한국의 주택에 일시적으로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불법적으로 무역을 하기 위하여 한국인의 집을 사는 일본인들과는 다르다. 이런 조건에서 의약업이나 무역을 위하여 왕래하는 일본인들은 계산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이전의 선교사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울릉도에 사는 일본인들은 정당한 비자가 없이 불법적으로 왔다. 그들은 불법적으로 집을 짓고 땅을 개간하며 무분별하게 벌목을 하고, 우리 주민들을 해친다. 이 모든 행동들은 절대로 합법적이라고 할 수 없다….” (계속)

“…나는 일본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일본 민간인들을 퇴거시킬 것이며 새로운 금지법을 만들것이라는 문서를 받기 위하여 몇 년을 기다려 왔다. 아직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으며 이것은 우리정부가 귀 정부로부터 기대하는 바가 아니다. 또한 강원도 수토사의 보고에 의하면, “…일본정부는 울릉도에 경찰을 주둔시키고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분쟁이 있으면 한국인만 체포하고 처벌한다…” 이 보고서에서 말하는 바는 일본경찰의 주둔은 분명히 조약 위반이다. 우리는 다른 나라들이 이런 사례를 따를까 걱정한다. 따라서 나는 긴급하게 우리의 깊은 유감을 표시한다.

나는 귀 사무실에서 이 문제를 깊이 고찰하고 귀국에 자세히 보고하기 바란다. 그리고 울릉도에서 경찰을 철수시키기 요청한다. 나는 또한 귀 사무실에서 조약에 따라 가장 가까운 영사관으로 귀 시민들을 소환하기를 요구한다. 상호 우의를 생각하여 마음에 새겨주시기를 바란다…”

위 왼쪽: 이 일본 신사는 20세기 초 한국의 울릉도 사동에 있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1905년 리앙쿠르 암초(독도)를 일본에 편입하기 전에 울릉도에 많은 집을 짓고 살았다. (클릭 이미지)
1902년 10월 29일, 일본의 대신 하야시와 한국정부
한국정부에게 다시 도해자들과 경찰일본의 퇴거를 거부한다
하야시는 일본이 문서를 편지를 한국에 보내는데 이는 하야시 곤수케의 한국땅에 대한 충격적인 내용의 제목이다. 하야시는 이런 혼란에 대해서 한국을 비난하고 조선이 이 지역에 그들의 항해로 인하여 “울릉도가 개항하게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실제로는 1800년대 일본은 불법적으로 벌목을 하였고 세금을 포탈하고 물건값을 시세이하로 지불하면서 목재를 일본으로 수출하였다. 그의 한국과의 초기 대응에서 한국이 요구한 일본일들의 철거와 관련하여 그는 한국에 일본경찰이 주둔할 권리가 없다고 양해하였으나, 그는 간단히 한국측의 요구를 무시하고 경찰에 공격을 가할 경우 “경고장을 발부”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야시의 말 어디에도 울릉도에서 철수하라는 조선의 요구를 고려한 부분이 없다. 해가 가면서 러일전쟁이 터지자 한국은 조금씩 조금씩 일본제국군대가 강점하게 되었다.

“…나는 이번 달 13일 #115 편지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고 있다. 이 편지에 귀하는 울릉도에 거주하는 우리 일본인이 철수할 것을 요구하고 또 일본경찰의 주둔을 말하였다. 일본인 철수 문제는 2년 전에 이미 논의한 바 있다. 귀하 측에서 그해 9월 우리의 최종 공식편지 #99에 대해서 답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귀하가 우리의 상황을 수락한 것으로 보았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귀하로부터 다른 편지를 받고보니 매우 놀랍다. 일본인의 정착 문제는 10년 전 전임 군수 배계주가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을 개발하려고 계획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우리는 개인적으로 귀국의 울릉도에서 자연적으로 자라는 물푸레나무의 독점 교역을 위하여 항해를 요청받았다. 그것이 일본인 항해의 시작이었다. 그때 이후 귀국의 민간인들도 울릉도로 항해하여 왔고 오늘날 울릉도의 상황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그 개발은 우리 일본사람의 항해 덕분이라고 말하는 것이 과장이 아니다.

위의 내용을 살펴보면 한국측에서 일본인 거주자를 더 보호해주어야 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이제 약간의 이익이 생기려고 하는데, 귀국이 조약의 법규를 근거로 우리 국민을 철수하라고 한다. 이것은 울릉도 개발에 대한 귀국의 배려가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시 말하면, 우리 당국은 울릉도의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고려하여 달라는 것이다. 우리 일본 경찰의 파견과 주둔은 박재순 외무대신이 재임하는 동안 울릉도를 강양우가 통치할 무렵에 울릉도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통제하려는 수단으로 발생한 결과이다. 오늘날, 귀 정부에서 “조약위반”으로 비난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귀하의 편지에서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분쟁이 있으면 경찰은 단순히 일본인 편만 들어 한국인을 체포하고 심문한다 …”고 지적하였는데, 우리는 우리 경찰이 그런 일을 하였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경찰 감독을 보내서 그 경찰을 경고하고 타이르도록 보낼 작정이다. 따라서 우리는 귀국 정부에서도 울릉도 군수에게 말해서 너그러운 법을 집행하도록 기대하며, 특히 울릉도 경찰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는 바입니다. 이 보고서와 관련하여 귀하의 값진 고견을 기다리겠습니다…”

울릉도 상황에 대한 일본의 1902년 보고서
“울릉도의 일본인 불법거주자들은 무지하고 폭력적이며 통제불능이다….”
1902년 일본의 보고서에는 울릉도 불법체류자에 대해서 자세히 보고를 하고 있는데, 일본 체류자들이 얼마나 한국본토인들을 포악하게 다루는지 묘사하고 있다. 상황이 여기까지 악화된 것은 한국의 영토에서 불법을 저지른 불법이민자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일본경찰을 불러온 때문이다.
일본인 거주자들의 일반적인 상황:

“…더욱 더 많은 일본인들이 이곳(울릉도)에 오게 되자, 나쁜 사람들도 오게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고 여기서 규제가 필요하게 된었다. 여기서 일본인의 상공단체가 필요하게 되었고 소위 日商組合이 탄생하게 되는데,두 사람을 선출하여 거류민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거류자 수가 점차 크게늘어나자, 법적인 강제만으로는 통제하기가 어려워졌다. 더구나 대부분의 이주자들이 무식하고 무지했기 때문에, 두 개의 집단이 생겨났었다. 강자가 약자를 복종시키고, 꾀가 많은 사람들은 무지한 자를 속였다. 또한 극단적인 경우로, 나쁜 사람들은 위험한 무기로 재산을 강탈하였다.

좋은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을 통제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심한 피해를 입었다. 따라서 메이지 24년 6월(1902년) , 지역사회의 중요한 사람들이 모여서 정상적인 사람들과 회의를 하고 협회를 결성하기로 결정하였다. 늙고 나쁜 사람을 걸러내기 위하여 그들은 회장과 부회장을 선출하고 봉급은 없이 고문 한사람만 봉급을 지불하였다…” (계속)

“…이 사람들은 또한 15명의 명예 대표를 선출하여 그들 밑에서 일하도록 하였고 회의와 판결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사건들을 다루도록 하였다. 협회는 또한 법률을 강화하도록 힘썼다. 예를 들면, 그들은 죄인들을 새로 만든 유치장으로 보내서 범죄를 반성하도록 하였으며, 중범죄를 저지른 자는 본국(일본)의 경찰서로 보냈다.

이해 1월 4일 두 집단 간에 논란이 벌어졌다. 이전의 협회장이 벌채꾼들을 설득시켜 현 협회를 붕괴시키려고 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그 협회를 떠나서 자기 편으로 들어오도록 설득하였다. 현재의 회장은 중재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애를 썼지만, 실패하고 자기들이 떠나기로 하였다. 이에 울릉도 주재 일본인들은 두 집단으로 나누어졌다. 거류민의 3/4이 협회를 떠났고 1/4만 남았다.

두 집단은 영업거래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거래에서도 대립하였다. 협회가 쇠퇴하고 번창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들은 질서를 유지하고 절대로 상대방 집단에 굴종하지 않았다. .그해 4월 23일 외무부는 울릉도에 경찰 파출소를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위 왼쪽 사진: 한국 울릉도에 있는 많은 일본 신사 중의 하나. 멀리 있는 산에 나무가 없음을 보라. 20세기 초에 울릉도의 “풍부한 산림”은 사라졌다.
1902년 울릉도의 인구
1902년 울릉도의 일본인 거주자 수와 거주지역
아래 오른쪽 이미지는 울릉도에 관한 일본 보고서에는 1902년 경의 일본인과 한국인의 가구 숫자가 있다. 아래 1905년 지도는 일본이 독도를 편입하기 전에 울릉도에 불법체류하는 일본인들이 ‘임시 마을’(日本人部落居留)을 건설한 곳을 보여준다. 이런 불법 거주지는 지도에 이중 원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한개의 원 표시는 한국인의 거주지이다. 이 지도는 일본제국 해군의 망루(望樓)가 1904~1905년 러일 전쟁동안 울릉도에 세워졌음을 보여준다.
도동 (道洞) – 한국인 27 명; 일본인 36명
복동 (伏洞) – 한국인 10명; 일본인 2명
중령 (中嶺) – 한국인 30명; 일본인 2명
통구미 (通龜尾) – 한국인 20명; 일본인 5 명
굴암 (窟巖) – 한국인 7명
산막곡 (山幕谷) – 한국인 26명
향목동 (香木洞) – 한국인 17명
신촌 (新村) – 한국인 35 명; 일본인 1명
추산 (錐山) – 한국인 7명; 일본인 1명
천년포 (千年浦) – 한국인 6명
천부동 (天府洞) – 한국인 16명
정석동 (亭石洞) – 한국인 20명
내수동 (乃守田) – 한국인 11명; 일본인 2명
사공남 (砂工南) – 한국인 2 명
사동 (沙洞) – 한국인 40명; 일본인 2명
신리 (新里) – 한국인 7명
간령 (間嶺) – 한국인 10명
남양동 (南陽洞) – 한국인 57명; 일본인 9명
수층 (水層) – 한국인 1명; 일본인 1명
대하동 (臺霞洞) – 한국인 34명; 일본인 6명
현포 (玄浦) – 한국인 50명
광암 (光岩) – 한국인 10명
나리동 (羅里洞) – 한국인 30명
창동 (昌洞) – 한국인 6 명; 일본인 2명
죽암 (竹岩) – 한국인 11명; 일본인 5명
와달리 (臥達里) – 한국인 2 명
저동 (苧洞) – 한국인 62 명; 일본인 5명
왜 일본은 독도 – 다케시마를 가질 수 없는가, 1905년 독도와 현재
1905년과 현재의 울릉도 독도 지역 인구
몇 몇 1905년도 문서에서는 당시의 울릉도 그림을 잘 묘사했다. 먼저 1902년 일본의 첫번째 측량때 상황은 일본인 체류자들이 1902년 정도에는 울릉도 전체에 퍼져있었음을 볼 수 있다. 심지어 이런 외교관들은 이 사람들이 무지하고 공격적이며 폭력적 범죄자들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서울주재 외무대신 하야시 곤수케는 “이 자들은 물리적인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평하였다.

어떤 일본 보고서에서는 일본거류민들이 전체 인구의 20%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봄에는 200명의 어부들이 건너왔다가 인구가 1,000명에 달한다. 오늘날 1,000명의 한국인들이 울릉도에 사는데, 독도와 울릉도 관리는 울릉도 도동 관청에서 한다.

울릉도 독도 지역 정치, 1905년과 현재.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은 울릉도에 대한 통제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위의 통신연락으로 보아 일본 체류자들은 한국 거주자들을 압도하였다. 한국정부는 이들 불법 체류자들을 추방하기 위하여 여러 차레 명령을 내리고 있지만, 일본정부는 그 요구를 간단히 무시해버린다.

1902년에 울릉도 섬은 일본 경찰에 의해서 통제된다. 1904년 러일 전쟁동안, 울릉도는 일본해군에 점령되고 3개의 군사초소와 전신통신소가 건설되었다. 그후 한달 만에 독도는 일본에 편입되고 한국해안으로의 접근과 내륙천으로 진입이 자유로워졌다. (아래 문서를 보라) 물론 이 당시 울릉도 군수는 울릉도와 독도를 모두 관할하였다. 1905년 당시 한국수역에서 일본은 어로와 항해의 자유가 없었다.

위의 문서는 미국외교부에서 나온 것으로 하야시가 일본이 독도를 편입한 후 한달만에 어떻게 한국 해안과 본토에 접근하고자 하였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자세한 문서는 일본의 최근에 획득한 한국외교 “권리” 감독권을 나타내고 있다.
왜 일본은 독도 – 다케시마를 가질 수 없는가: 결론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 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울릉도가 1905년 일본 제국해군이 독도를 편입하기 전부터 일본의 섬으로 되어가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된 말이 아니다. 정치와 인구요서는 고대 한국의 영토에서 일본의 식민지로 변해가고 있었다. 점차 한국인들은 경쟁할 수 없었고 울릉도에서 밀려났다. 실제로 1905년 일본이 독도를 차지했을 때, 일본과 한국 사이에는 경계가 전혀 없었다. 일본 불법체류자들, 밀수업자들, 밀렵꾼들 그리고 침입자들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울릉도 자연 자원과 주변 수역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일본의 과거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이다. (그리고 현재) 독도에 대한 주장이다. 언급한 바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울릉도에 불법으로 체류한 사람들 중의 하나인 나까이 요사브로는 일본의 독도 편입의 전체 바탕이 되었다. (link1) (link2)
국제법상으로 독도 다케시마의 획득은 일본과 한국의 현대 경계로 결정될 것이다. 오늘날, 일본정부는 1905년의 역사적 여건에서 한국의 영토 한계를 다시 규정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은 독도문제를 해결하는데 실질적인 접근이 될 수가 없다. 또한 현재의 한일 해양 조약에서도 허용될 수 없는 전제이다.

일본 외무성은 한국을 과거 식미지 시대로 끌어가려고 애쓰고 울릉도 한국의 거류자를 현재의 해양 경계선으로 끌어가려고 한다. 일본은 시마네 현을 부추겨서 6세기 이후 한국 땅이 된 섬의 현관을 두드리게 하고 있다. 역사는 우리에게 국경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이라고 가르쳐 준다. 해양경계선을 식민지 시대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 긋는 것은 소련 공산주의에게 다시 항복하는 것과 다름없다. 한국과 일본은 독도 다케시마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일본이 최종적으로 동북아시아의 상황은 1905년 당시의 상황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수긍할 때만 해결될 수 있다.